2007년 05월 08일
프로야구 25년 역사 빛낸 불멸의 라이벌들
[마이데일리 2006-11-29 15:44 이석무 기자]
‘라이벌(Rival)’이라는 단어는 ‘맞수, 경쟁자’라는 뜻을 가진다. 이 단어의 유래는 강을 의미하는 ‘river’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즉 강을 사이에 두고 싸우던 부족들이 가뭄으로 강이 마르게 되면 서로 힘을 합쳐 물을 찾으러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라이벌이란 ‘치열한 경쟁관계’를 전제로 하면서 함께 발전을 도모하는 관계인 것이다.
1982년에 화려하게 막을 올린 한국 프로야구도 어느덧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 프로야구가 수많은 우여곡절을 딛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는 선수들간의 치열한 경쟁과 그로 인한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한국야구를 빛낸 수많은 라이벌들의 대결 속에서 팬들은 야구에 더욱 열광하고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지난 프로야구사 사반세기를 뜨겁게 달궜던 불멸의 라이벌들을 되돌아보면서 한국 프로야구의 지난 날을 돌아보자.
▲ 최동원 대 선동열 : 짧지만 너무도 굵었던 명승부

지금도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를 꼽으라면 많은 야구팬들은 롯데 최동원(현 한화 코치)과 해태 선동열(현 삼성 감독)을 주저 없이 선택한다. 이들이 함께 전성기를 누린 시기는 정말 짧았지만 그래서인지 이들이 남긴 인상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모든 면에서 라이벌적인 면이 강했다. 최동원이 영남 출신인 반면 선동열은 호남 출신이었다. 게다가 최동원이 연세대 출신인 반면 선동열은 고려대를 나왔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에 연, 고대라는 사학 명문간의 경쟁구도까지 더해지면서 둘간의 라이벌 의식은 더욱 하늘을 찔렀다. 최동원이 커브를 주무기로 한 반면 선동열은 슬라이더에 강점을 가질 만큼 스타일도 달랐다.
1980년대 중반 최고 투수자리를 다퉜던 최동원과 선동열은 총 3차례 맞붙었다. 1986년 4월 19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첫 맞대결에서는 선동열이 최동원을 상대로 1-0 완봉승을 거둬 프로데뷔 첫 완봉승의 영예를 맛봤다. 하지만 최동원은 같은 해 8월 19일 부산에서 선동열과 다시 맞붙어 2-0 완봉승을 이끌어 첫 대결의 패배를 멋지게 설욕했다.
완봉승으로 장군멍군을 주고받은 가운데 진정한 명승부는 1987년 5월 1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펼쳐졌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이날 경기에서 나란히 선발로 나와 15회를 완투하며 단 2실점만을 내줬다. 4시간 56분의 엄청난 경기를 치르면서 최동원은 209개, 선동열은 232개의 공을 던졌다. 2-2 무승부라는 결과는 어찌보면 신이 내려준 공평한 선물이었다. 누군가에게 패배가 돌아갔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을 만큼 이날 두 투수의 투혼은 놀라웠다.
아쉽게도 최동원과 선동열의 명승부는 이것으로 막을 내렸다. 선동열은 이후 최고의 투수로 계속 이름을 날리며 1996년 일본 진출전까지 146승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 1.20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최동원은 이후 트레이드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내리막길을 걸은 끝에 겨우 32살 때인 1990년 은퇴를 결정했다.
▲ 이만수 대 김성한 : 80년대 진정한 최고타자는 누구?

나란히 1958년 개띠 동갑내기인 삼성 이만수(현 SK 코치)와 해태 김성한(전 KIA 감독)은 뛰어난 야구실력과 더불어 자신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앞세워 팬들을 사로잡았다. 각각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강타자로 이름을 날린 두 선수는 특히 호쾌한 홈런포로 야구인기를 끌어올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펼쳐 ‘헐크’라 불린 이만수는 1980년대 명실상부 최고의 타자였다. 1984년 타율, 타점, 홈런 타이틀을 휩쓸며 최초의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무려 12개의 개인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또 12차례 타이틀 수상 기록은 지금까지도 프로야구 최다 타이틀 수상기록으로 남아있다. 1985년에도 이만수는 홈런, 타점, 승리타점 부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반면 엉덩이를 뒤로 빼는 독특한 타격폼으로 유명했던 김성한은 개인 기록적인 면에서는 이만수에 약간씩 미치지 못했다. 1985년 이만수와 함께 공동 홈런왕에 오른 뒤 1988년과 89년에 디시 홈런왕을 차지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대신 김성한은 이만수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7번이나 되는 한국시리즈 우승 기억이 그것.
이만수와 김성한의 라이벌 의식이 불을 뿜었던 것은 1985년 MVP 경쟁에서였다. 당시 MVP는 우승팀 삼성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이만수가 유력했다. 하지만 추측은 보기좋게 빗나갔고 수상 영예는 김성한에게 돌아갔다. 당사자들은 물론 직접 투표에 나선 기자들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을 정도로 의외의 결과였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지도자 생활은 그다지 순탄한 편이 아니었다. 야구선수를 그만둔 뒤 미국으로 건너간 이만수는 갖은 고생 끝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 유급코치로 활약했다. 하지만 정작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여러 사정상 돌아오지 못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김성한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 1997년부터 해태 코치로 4년의 시간을 보낸 뒤 2001년 부터 해태의 뒤를 이은 KIA의 감독직을 맡았지만 여러 시행착오 끝에 2004년 7월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현재는 KBO 경기위원으로 활약중이다.
▲ 이상훈 대 구대성 : 한-미-일 누빈 파란만장 야구인생

이상훈(전 LG)과 구대성(한화)은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 프로야구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왼손투수였다. 구대성의 경우는 아직도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둘은 같은 왼손투수인데다 한국-일본-미국을 두루 거친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을 걸어왔기 때문에 자주 비교가 되곤 한다.
1993년 프로 입단 동기인 이상훈과 구대성은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기량을 발산했다. 국내 무대에서는 이상훈이 구대성 보다 반발 정도 앞서나갔다. LG유니폼을 입은 이상훈은 프로 2년째인 1994과 1995년 선발로 각각 18승과 20승을 거두더니 1997년에는 47세이브로 최다구원 신기록을 세웠다. 반면 구대성은 거의 구원투수로 나선 탓에 강한 인상을 심지 못했다. 1996년 다승(18승)과 구원 부분(40세이브포인트)을 동시에 석권하는 진기록을 세운 것이 눈에 띌 뿐이었다.
하지만 해외로 눈을 돌린 이후 보다 평탄했던 쪽은 구대성이었다. 1998년 일본 주니치에 진출한 이상훈은 이듬해 중간계투로 활약하며 팀의 재팬시리즈 진출에 기여했지만 그 다음해 미국 메이저리그 보스턴에서는 9경기 등판에 그쳤다. 반면 구대성은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오릭스에서 4년간 안정적으로 활약을 펼쳐 이상훈과 대조를 이뤘다. 그 역시 지난해 미국 뉴욕 메츠에서 쓴 맛을 보기는 했지만 2006년 친정팀 한화로 돌아와 예전의 강력함을 뽐내면서 국내야구팬들을 흥분시켰다.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을 걸어온 덕분에 이상훈과 구대성은 한국과 미국, 일본 프로야구를 거친 희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더 이상 이상훈의 투구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2살이나 많은 구대성이 여전히 힘 넘치는 역투를 펼치는 가운데 이상훈은 2004 시즌 중반에 은퇴를 선언한 뒤 록그룹 리더로 변신해 새 인생을 펼치고 있다.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많은 야구팬들은 지금도 30대 중반밖에 안되는 이상훈이 지금까지 꾸준히 구대성과 멋진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 이승엽 대 우즈 : 일본까지 이어진 끈질긴 라이벌 인연

최고 홈런타자 자리를 놓고 펼쳐진 이승엽(요미우리)과 타이론 우즈(주니치)의 자존심 대결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삼성에서 활약하던 이승엽은 32홈런을 쳐 생애 첫 홈런왕에 등극했다. 하지만 이듬해 한국 땅을 밟은 우즈(당시 두산)는 그 해 42홈런을 쳐 이승엽(38홈런)을 누르고 최고의 거포로 우뚝 섰다. 특히 그 해에는 마치 2006년 올해처럼 줄곧 앞서나가다 역전을 당해 이승엽으로선 아쉬움이 더 남을 수밖에 없었다.
1999년 심기일전한 이승엽은 54홈런을 쳐 34홈런에 그친 우즈를 크게 제치고 홈런왕 벨트를 탈환했다. 하지만 그 다음 해 우즈는 2000년 홈런 2위(39개)로 이승엽(36개)에게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승엽은 2001(39홈런), 2002년(47홈런)으로 2년 연속 홈런왕에 올라 우즈(2001년 34개, 2002년 25개)와의 경쟁을 종식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02년 일본에 진출한 우즈는 요코하마 소속이던 2003년(40홈런)과 2004년(45홈런) 2년 연속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오르며 한발 더 도약하게 된다. 2003년 홈런 한시즌 아시아신기록(56홈런)을 세운 이승엽은 뒤늦게 일본에 건너갔지만 2004년 14홈런, 2005년 30홈런에 그쳐 우즈에게 크게 미치지 못했다.
올해 요미우리 4번타자로 변신한 이승엽은 일본무대 적응을 완전히 마치면서 리그 홈런왕 자리를 맡아놓은 듯 보였다. 하지만 이승엽이 무릎부상으로 주춤하는 사이 뒤늦게 발동이 걸린 우즈에게 덜미를 잡힘으로써 홈런왕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최종 결과는 41-47로 이승엽의 완패였다.
이승엽과 우즈의 홈런 경쟁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더 큰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본격적인 일본야구 평정을 시작한 이승엽과 이미 일본 최고의 거포로 자리매김한 우즈의 홈런대결 2라운드가 벌써부터 야구팬들의 가슴을 뒤흔들고 있다.
▲ 류현진 대 이대호 : '트리플크라운' 간의 MVP 전쟁

2006년 프로야구는 매우 뜻깊은 해임에 틀림없다. 바로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투수와 타자부문에서 트리플크라운이 탄생했기 때문. 고졸신인 류현진(한화)은 데뷔 첫해 놀라운 돌풍을 일으키며 다승(18승) 평균자책(2.23) 탈삼진(204개)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올랐다. 1991년 선동열 이후 15년만에 달성한 투수 3관왕.
또 이대호(롯데)는 올시즌 타율 1위(.336), 타점 1위(88개), 홈런 1위(26개) 등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다. 거기에 장타율(.571) 타이틀까지 차지해 무려 4관왕에 올랐다. 최다안타 역시 2위. 트리플크라운 포함, 타격 4관왕은 1984년 삼성 이만수(현 SK와이번스 코치) 이후 처음이었다. 투고타저 현상때문에 수치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가장 넓은 사직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홈런왕을 차지한 것은 분명 놀라운 결과였다.
하지만 두 선수 모두 최고의 활약을 펼쳐 충분히 MVP를 받아 마땅하지만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를 주인공은 단 1명뿐이었다. 야구 전문가들과 팬들은 기록에 대한 우열논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유례가 없었던 대접전끝에 수상의 영예는 팀 성적이라는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 류현진에게 돌아갔다. 류현진은 MVP와 신인왕 동시수상이라는 겹경사까지 누렸다.
그동안 이승엽이 일본으로 향한 이후 대형스타 부재에 시달렸던 한국 프로야구는 단숨에 정상까지 내달린 두 스타에게 열광했고 일거수 일투족을 주목했다. 비록 MVP 트로피의 주인은 한 명뿐이었지만 ‘진정한 MVP’는 두 선수 모두인 셈. 2006년을 계기로 새로운 라이벌로 우뚝 자리잡은 류현진과 이대호가 앞으로 새롭게 써나갈 한국야구 역사에 야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될 전망이다.
(이석무 기자 smlee@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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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7/05/08 14:54 | Player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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