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완과 강민호, 그리고 볼배합

며칠 전 방글이님이 나에게 이런 댓글을 남겼는데, 그것을 이제야 봤습니다. 그래서, 한 말씀 드리려고요...

요즘 야구장을 갈 기회가 적어서 티비를 통해서 많이 봅니다. 그러면서 게임의 흐름도 중요하지만 내가 타자라면 포수라면 투수라면 하는 상상을 하면서 경기를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강민호의 리드를 본다면 제 예상을 많이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전 야구를 좋아하는 그냥 팬일 뿐인데.. 내 예상과 비슷하다니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좋게 생각하면 저는 뛰어난 야구 센스를 가진 팬이구나 싶습니다.


1. 구종과 로케이션 선택의 기본

방글이님처럼 야구 센스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아래와 같은 사실에 대해 그닥 새로움을 느끼지 않을겁니다.

"투수와 타자 대결의 핵심은 타이밍이다."

배팅 타이밍을 뺐기 위해 투수는 타자와 싸움을 하지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투수에 대한 그 싸움의 지휘권은 포수에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볼배합이란 것이지요.

그런 타이밍 싸움을 위한 기본 원칙은 공에 대한 타자의 시각 정보를 왜곡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로케이션에 있어서 아래 그림처럼 X형을 유지하는 것이 볼배합의 원칙입니다.

또한, 아래 그림처럼 L-zone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2 스트라이크 이후에 던져야 할 로케이션의 정석인데, 상대 타자에게 안타를 맞을 확률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포수가 투수에게 요구하는 볼배합에는 이렇게 일정한 원칙이 있습니다. 물론, 실전에서는 이 원칙이 변형되지만, 크게 엇나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야구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포수의 볼배합 예측을 잘 하는 이유는 저러한 원칙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종 선택의 원칙도 마찬가집니다.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선 구속과 공의 궤적 변화가 핵심이지요. 제 아무리 빠른 공을 던진다해도 그것만 계속 던지면 안타를 맞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변화가 타자의 배팅 타이밍을 빼앗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많은 야구팬들은 손민한이 포심, 슬라이더, 그리고 스플리터를 주로 던지고, 때때로 투심이나 커브를 섞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실제 경기를 보다 보면, '아, 오늘은 슬라이더가 잘 먹히고, 스플리터는 별로구나'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구종에 대한 예측도 가능해집니다. 게다가, 카브레라처럼 포심, 커브, 그리고, 체인지업, 딱 이 3가지 구종만으로 던지는 투수라면 그 예측의 적중률은 보다 높아지겠지요.

이처럼, 볼배합에 관한 몇 가지 원칙과 각 투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 수록 볼배합 예상의 적중률은 높아집니다.


2. 좋은 볼배합이란...

한국 리그 최고의 포수 박경완은 "볼배합에는 정답이 없다"고 늘 말합니다. 본인이 십수년 동안 연구하고 경험했어도, '볼배합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정답을 찾을 수 없다는 얘긴데, 바꾸어 말하면 '과연 볼배합 능력 혹은 좋은 볼배합이란 것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회의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NPB 최고의 포수라는 후루타 아쓰야는 "볼배합은 가위 바위 보와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경우의 수가 충분히 늘어나면 결국 이길 확률에 있어서 상대와 나의 차이가 거의 없어지는 게임 말입니다.

좋은 볼배합에 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김시진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볼배합 미스는 없다. 다만, 투수의 제구 실수만이 있을 뿐" 좋은 볼배합에 대한 역설적인 설명임에 분명하지만,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포수 조련 일인지라 불리는 조범현 역시 그 말에 동의한 적이 있습니다. 즉, 모든 포수의 볼배합 자체는 안타를 맞을 확률이 낮게 가져가지만, 안타를 맞는 이유는 결국 투수가 제대로 공을 던지지 못해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렉 매덕스의 볼배합이 복잡하거나 기묘해서 그가 마스터인걸까요? 다니엘 리오스는 그다지 다양한 구질과 볼배합을 구사하는 투수가 아닌데 어째서 MVP급 투구를 하고 있는걸까요?

중요한 건 포수의 볼배합 능력이 아니라, 투수의 투구 능력입니다.


3. 좋은 포수란...

우리는 볼배합의 원칙이 로케이션과 구종의 변화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헌데, 어째서 볼배합을 잘하는 포수와 그렇지 못하는 포수가 있는걸까요?

포수 박경완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 그 경기에서 본인이 받은 모든 공에 대한 복기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4회초 선두 타자인 정수근에게 요구한 두 번째 공은 바깥쪽 슬라이더였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또한, 그는 경기에 임하기 전에 최소 6개의 기록지를 숙지한다고 합니다. 상대팀과 자기팀의 이전 3게임, 그리고, 당경기 직전에 펼쳐진 상대팀의 3게임.

박경완의 머릿속에는 이 6게임의 기록지를 통해 상대팀 타자의 습성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고, 박경완은 실제 경기에서 그 정보가 주는 실마리에 따라 볼배합을 가져간다고 합니다. 1번에서 말했던 볼배합 원칙의 실전 변형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상대 타자들에 대한 정보의 양과 질의 탁월함. 그가 한국 리그 최고 포수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박경완은 좋은 포수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점을 볼배합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는 "투수의 마음을 잘 읽는 포수"가 가장 좋은 포수라고 말합니다. 투수의 성격이나 당일 경기의 몸상태등을 잘 알고 배터리간에 믿음을 공유할 수 있어야만 타자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좋은 포수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은 베테랑들인가 봅니다.


4. 강민호의 볼배합 능력에 대한 평가

방글이님이 남긴 댓글로 돌아갑니다. 방글이님은 강민호의 볼배합이 본인의 예상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럴까요?

이런 실험을 해 봅시다. 포수가 투수에게 사인을 보내기 전에 미리 볼배합을 예상하고, 포수가 실제로 요구한 것과 비교합시다. 그리고, 이것을 선발 투수의 초구부터 최종 투수의 마지막 공(보통 150여 개 정도 될 듯)까지 모조리 해 봅시다.

나는 6~7년 전에 그런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적중율이 박기혁의 타율과 정수근의 타율 사이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도 적중률이 더 낮아질겁니다. 왜냐면, 그 때 내가 갖고 있던 타자와 투수에 대한 정보의 양이 지금보다 더 많았거든요.

당시에는 나도 포수의 볼배합을 꽤 잘 예상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끔 몇 번 씩 하는 예상이 운 좋게 맞았던 것 뿐, 실제 한 경기를 통채로 예상하면 그 적중율이 형편없는 수준으로 낮아진다는 걸 알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볼배합은 가위 바위 보 게임과 비슷합니다. 숫자가 많아지면, 서로가 이길 확률은 비슷해지지요. 그러니까, 일정한 패턴하에서 랜덤하게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예측의 적중률은 한계가 있다는 얘깁니다(만약 예측의 적중률이 굉장히 높다면, 그것은 야구 센스가 아니라 독심술에서 다룰 영역이 아닐까요?).

어쩌면, 강민호의 볼배합 예상에 대한 적중율이 박경완에 대한 그것보다 조금 더 높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민호와 롯데의 투수들에 대한 정보보다 박경완과 와이번스 투수들에 대한 정보가 훨씬 더 적기 때문일겁니다. 롯데 경기를 SK경기보다 8배 정도는 많이 보니까요.

그래서, 자신의 볼배합 예상에 대한 적중율로 강민호와 박경완을 비교하는 건 다소 넌센스로 보입니다.

물론, 전문가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경험과 정보를 갖고 있을테니까요. 내가 볼배합 측면에서 강민호를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강민호보다 리그의 타자나 롯데의 투수에 대한 정보가 적을 것이라는 가정 때문입니다(그리고, 그 가정은 아마 '참'일겁니다). 강민호보다 더 적은 정보를 갖고 강민호를 평가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타자나 투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도구들은 나에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록이 바로 그것이고, 그것은 객관적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그 도구들로, 타자의 공격력과 투수의 피칭 능력을 평가합니다(물론 그 평가의 적절함 정도는 논외로 하고).

하지만, 포수의 볼배합에 대해선 그것을 평가할 만한 정보와 도구가 내게 충분하지 않습니다. 경험도 아직 없고.

기껏해야, '이대형한텐 몸쪽 떨어지는 공이 쥐약이라고 이순철이 그러더라, 거길 노려!' 혹은 '박한이 저 놈, 지난번에 영식이가 바깥쪽 슬라이더로 삼진 잡은 적 있잖아, 이번에도 한번 시도해봐!'...라는 정도?

그래서, 나는 강민호가 다른 포수들에 비해 볼배합을 잘 하는지 못 하는지 말할 수 없는 겁니다.

강민호나 박경완이 갖고 있는 타자와 투수들에 대한 정보가 내게도 있다면, 나도 그들을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강민호, 이 멍청한 새끼야. 김한수는 바깥쪽 공에 강한 놈인데, 결정구를 거기로 던지면 어떡해?" 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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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넘나 | 2007/09/04 14:06 | Player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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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Giants Journal :.. at 2008/04/30 11:17

... 둡니다. 지난 해 포수 강민호에게 쏟아졌던 비난 가운데, 이 부분이 꽤 컸지요.그런데, 볼 배합 능력이란 것이 정말 존재할까요? 글쎄, 그것에 관해선 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요.현재 리그 최고 포수인 박경완은 "투수의 마음을 잘 읽는 포수"가 가장 좋은 포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꽤나 문학적인 표현인데요, 조금 더 기술적으로 풀자면,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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